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 (문단 편집) ==== 두 사령관 간의 대립 ==== [youtube(fRz_05kWYao)] 538년 3월, 포위가 끝날 무렵에 벨리사리우스가 보낸 문딜라스의 1천 군대는 해상으로 [[제노바]]에 상륙하였고, 리구리아 일대를 평정하며 메디올라눔([[밀라노]])에 입성하였다. 그에 위협을 느낀 동고트 왕국 측은 북쪽의 [[프랑크 왕국]]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탈리아의 부를 탐낸 [[부르군디]] 족[* 부르군디 왕국은 411년에 세워졌고 532년에 [[오툉]] 전투에서 프랑크 족에게 대패한 후 534년에 프랑크 왕국에 합병되었다.]은 빠르게 남하하였고, 동고트 군대와 합세하여 밀라노를 포위하였다.(538년 4월) 한편,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동해안의 아르미니움를 점령한 요한네스의 2천 기병대는 벨리사리우스의 회군 명령에 불복하였고 기세를 몰아 안코나까지 점령, 라벤나까지 넘보려하였다. 로마시에서 철수한 비티게스는 538년 3월 ~ 4월 동안 아르미니움(리미니)를 포위 공격하였다. 또 다른 동고트 군대는 안코나로 진군, 동로마 군을 야전에서 격파하고 도시를 포위하였으나 함락에는 실패하였다. 537년 3월 ~ 538년 3월까지 벨리사리우스가 로마시를 지켜내는 동안,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보낸 지원군은 지중해를 건넜다. 그 대열의 마지막인 [[나르세스]]의 지휘를 받는 2천의 동로마 군대가 안코나 인근 항구인 피케움에 538년 4월에 상륙했다.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는 만나서 회의를 하였는데, 아르미니움 구원에 대한 의견이 엇걸렸다. 자신의 의견에 불복한 요한네스를 구원하는 것에 벨리사리우스가 내켜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더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요한네스의 서신이 도착하자 그들은 의견을 모아 출정하였다. 벨리사리우스는 군대를 3개로 나누어 1로군은 해상으로, 2로군은 부장 마르티누스가 포위망 남쪽으로, 벨리사리우스의 본대는 북서쪽에서 접근하였다. 역포위 당할 것을 깨달은 비티게스는 재빨리 포위를 풀고 라벤나로 철수하였다. 이 승리로 제장들은 기존에 환관이라 무시하던 나르세스를 다시 보게 되었고, 특히 요한네스는 완전히 그에게 복종하였다. 여기서부터 두 명장 간의 대립이 시작되는데, 안코나와 라벤나를 공격하는 등 명령에 불복하였을 뿐더러 후에도 말썽만 부리게 되는 요한네스를 구출한 이득이 없었던 것이였다. 또한 나르세스의 의견대로 벨리사리우스가 요한네스를 구출하였지만, 정작 이를 실행한 벨리사리우스는 칭송을 못받고, 비교적 한 일이 적은 나르세스가 공을 가로챘기 때문이다. 이후의 진로에서도 나르세스와 벨리사리우스는 의견이 엇갈렸는데, 안코나 인근의 강력한 동고트 거점인 아욱시뭄(오시모)에 대한 공격을 주장한 벨리사리우스와 달리 나르세스는 더 쉬운 상대인 아에밀리아를 먼저 공격할 것을 주장하였다. 군의 분열을 원치 안았던 벨리사리우스는 중재안으로 우르비눔 공격을 제안하였고, 나르세스도 함께 진군하였으나 그래 여름 동안 따로 진영을 차리며 거리감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도시의 보급 사정이 좋은 것을 파악한 나르세스는 아르미니움으로 회군하였고, 요한네스가 이끄는 분견대를 파악하여 결국은 아에밀리아를 점령하였다. 한편, 벨리사리우스에게 천운이 따랐는지 우르비눔의 유일한 우물이 말라버렸고, 538년 말에 동로마 측에 항복하였다. 한편, 538년 4월부터 고트 - 부르군디 군에게 포위되어 있던 메디올라눔(밀라노)은 고립이 길어지며 함락이 임박하게 되었다. 문딜라스와 수백 명의 군대, 그리고 시민들은 합심하여 공성에 버텨내었지만, 로마시와 달리 수운으로 식량을 보급받지 못하여[* 당시 밀라노는 이탈리아에서 로마 다음으로 큰 도시여서 식량이 많이 필요하였다.] 시민들이 아사 직전까지 몰렸다. 이에 동고트 장군 우라이아스는 항복하면 그와 병사들의 신변을 보장해 주겠다고 하였지만 문딜라스는 시민들의 안위를 보장하지 않은 점을 들어 거절하였다. 539년 초에 벨리사리우스는 구원병을 파견하였지만 포위군의 규모에 겁을 먹은 장군 마르티누스와 울리아리스는 당시 아에밀리아에 주둔하던 요한네스와 유스티누스 등 나르세스 진영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나르세스의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출정하지 않겠다고 하였고, 때마침 요한네스가 병에 걸리는 바람에 합동 작전은 완전히 흐지부지 되었다. 이렇게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포위된 도시의 식량은 바닥이 났고, 병사들의 강요에 의하여 문딜리스는 결국 동고트 - 프랑크 연합군에 항복하였다. 약속대로 동로마 군은 포로가 되었지만, 밀라노는 게르만 인들에게 말그대로 폐허가 되었고[* 그래서 지금도 밀라노는 3세기 초부터 백여 년 동안 궁정이 세워지는 등 이탈리아의 중심지였음에도 불구하고 7세기 이전의 유적이 신 로렌저 석주를 제외하곤 전무하다. 대리석 파편 몇개만이 고대의 대성당 위치에 나뒹굴 뿐이다.] 시민들 대부분이 학살당하고 말았다.(539년 3월) 이후로 메디올라눔은 한동안 사료에 이름이 등장하지 않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